[민병식 칼럼] 피천득의 ‘인연’에서 보는 시절인연과 인연이라는 두 글자의 소중함

민병식

시절인연(時節因緣)은 불교에서 유래된 말로 모든 일이 적절하거나 결정적인 때가 되어야 이루어짐을 뜻하는 용어로 모든 인연에는 저마다의 때가 있고 때가 다하면 자연스럽게 멀어진다는 의미로 쓰인다. 

 

우리는 거미줄처럼 숱하게 얽히고설킨 인연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부모, 형제, 자녀, 친구, 하다못해 스쳐 지나가는 사람까지도 인연이라는 뜻의 힘을 빌려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그 어떤 인연도 영원한 것은 없다. 영원할 것 같던 부부도 연인도 헤어짐을 맞기도 하고 세상을 등지는 날이 각기 다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헤어짐을 생각해 보면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게 되어 있다는 회자정리의 뜻을 내포하고 있고 길고 짧음의 차이뿐 만남과 헤어짐이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임을 말해주고 있다고 본다.

 

피천득의 '인연'이라는 수필이 있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17세 때 일본 도쿄로 가게 되는데 사회사업가 M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 집엔 아침이라는 뜻의 '아사코'라는 어린 딸이 있었는데 그녀가 아침에 따다가 책상 위에 놓아준 꽃을 보고 그 꽃이 그녀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만남은 아사코가 대학생 때였는데 아사코는 작가를 기억했고 반가이 맞아준다. 

 

그녀는 영문과 3학년이었고 성심여학원을 함께 다녀온 후 밤늦게 까지 문학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운다. 세 번째 만남은 2차 세계대전 후 우리나라가 독립을 하고 다시 작가가 일본을 건너가 M을 만나고 일본인 2세 미군장교와 결혼한 아사코를 만난다. 마지막 만남에서는 작가와 아사코는 30대이면서도 백합처럼 시들어가는 모습이었으며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진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는 대목이다. 무언가 아쉬움, 비련, 그리움 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데 작가는 작품 속에서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고 정리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아쉬운 부분은 사랑에 성공하지 못하고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그리움으로 채우는 거다. 작가와 아사코의 세 번의 만남 주기는 각 십 년이 넘는 공백을 갖는다. 

 

작가는 그 공백을 사랑을 성취할 적극적인 기회로 삼지 못했을까. 아사코가 대학생 시절에 프러포즈했었다면 어땠을까. 아사코가 결혼을 하기 전에 작가가 일본을 다시 방문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작가가 아사코와 결혼했다면 마지막 아사코의 얼굴이 시든 백합이 아니라 아사코가 어릴 적 모습이던 스위트피의 모습으로 영원히 남았을 것이다. 어쨌든 작가는 결국 아사코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죽으면 다 끝나는 세상인데 아무리 인생이 시절인연의 연속이라고 하더라도 실패한 자신의 인연을 시절 인연으로 치부해 버리거나 위안을 삼고 어떠한 제약 때문에 포기한다면 진짜 소중한 인연을 스스로 시절인연으로 만들어버리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난 시절인연이란 단어를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느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멀어진다는 말은 시절마저 또 다른 인연이 생긴다는 말과도 같지 않을까. 물론 요즘 세상에 평생 딱 한 번의 인연을 만나 끊어지지 않는 꽈배기처럼 꼬인 밧줄 같은 인연을 만나서 죽을 때까지 가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겠으나 그 누구든 시절인연이란 말로 인생에서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소중한 인연을 헤어짐의 변명으로 앞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가는 인연을 만난 후 계속 이어져야 하는 관계로만 보지 않는다. 그래서 이어지지 않은 인연이기 때문에 오래 기억되는 만남이라고 한다. 짧은 만남이 오래 기억된다는 것은 아련함을 간직한 추억이지만 추억만 먹고 살 수는 없다. 자신의 생애에 단 한 번 올까 말까 하는 인연이라면 또 다른 인연이 대체하지 못할 수도 있기에 끝까지 이어가려고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끝까지 지켜내려고 하는 것이 내 의지로 지키는 인연이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시절인연 아닌가 한다. 

 

나는 인연을 소중히 했을까. 인연을 못 알아보고 그냥 내버려두었을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시절인연이었을까. 인연이란 두 글자에 담긴 소중함을 헤아려보는 중이다.

 

 

[민병식]

현) 한국시산책문인협회 회원

현) 시혼문학회 교육국장

현) 코스미안뉴스 칼럼니스트

2019 강건문화뉴스 올해의 작가상

2020 코스미안상

2021 광수문학상

2022 모산문학상

2022 전국 김삼의당 시·서·화 공모 대전 시 부문 장원

2024 아주경제신문 보훈신춘문예 수필 부문 당선

2025 원주생명문학상

이메일 : sunguy2007@hanmail.net

 

작성 2026.10.14 11:13 수정 2026.10.14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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