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러워서 참는다.” 이 말은 살다 보면 이 말을 한두 번쯤은 하게 된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삼키고,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그냥 넘어가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웃어야 할 때가 있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참고, 잘못한 사람이 큰소리치는 것을 보면서도 참는다. 약자에게는 참으라고 하고, 피해자에게는 이해하라고 하고, 힘없는 사람에게는 둥글게 살라고 한다.
왜 참을까. 용기가 없어서일까. 비겁해서일까. 아니다. 약자에게 참음은 때로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다. 직장에서 상사의 갑질을 견디는 사람은 당장 월급이 끊길까 두렵다. 돈을 빌린 사람이 돈을 빌려준 사람의 무례를 참는 것은 경제적 약자이기 때문이다. 명예와 권력을 가진 사람 앞에서 부당함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가진 사회적 자원이 그보다 적기 때문이다. 가족 안에서도 돈을 더 많이 버는 사람, 목소리가 큰 사람,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 상대를 누르는 일이 생긴다. 참는 것도 지혜지만, 무엇을 참지 말아야 하는지 아는 것은 더 큰 지혜다.
오늘의 모욕을 참아야 내일의 월급을 받을 수 있었고, 오늘의 억울함을 삼켜야 아이의 학원비를 낼 수 있었고, 오늘의 자존심을 접어야 가족의 생계를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약자의 침묵을 용기의 부족이라고 말하기 전에, 왜 그 사람이 침묵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만들었는지 먼저 물어야 한다. 참는 것이 생존의 방법일 수는 있지만, 참는 것이 언제나 미덕은 아니다. 한 사람이 참고, 두 사람이 참고, 열 사람이 참고, 모두가 “더러워서 참는다”고 말하는 순간 부당한 사람은 자신이 잘못한 줄도 모른 채 계속 갑질을 한다.
약자가 참는 동안 강자는 자신의 잘못을 배우지 못한다. 침묵이 길어지면 악행은 관행이 되고, 관행은 문화가 된다. 처음에는 한 사람의 횡포였던 것이 나중에는 조직의 방식이 되고, 사회의 관행이 된다. “원래 여기서는 그래.”, “다들 참고 다닌다.”, “그 정도도 못 견디면 사회생활 어떻게 하려고 그래.” 이런 말들이 쌓이면서 가해자의 행동은 정상으로 둔갑하고, 피해자의 고통은 유난스러움이 된다. 이것이 더 무서운 일이다. 갑질은 특별히 나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진 작은 우월감을 절제하지 못할 때 누구나 갑질하는 사람이 된다.
권력이 있다는 이유로, 돈이 있다는 이유로 이름이 알려졌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인격을 가볍게 여기는 순간 그 사람의 부와 명예는 더 이상 자산이 아니라 흉기가 된다. 부당함을 말한 사람이 일자리를 잃지 않고, 갑질을 고발한 사람이 보복당하지 않고, 돈이 없다는 이유로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제도와 공동체가 약자의 뒤에 서 있어야 한다. 진짜 필요한 것은 약자에게 용기를 강요하는 사회가 아니라, 약자가 말해도 무너지지 않는 사회다. 내가 당한 모욕을 다음 사람에게 되돌려주는 순간 피해자는 가해자로 바뀐다.
“더러워서 참는다”는 언젠가 내가 강자가 되었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더러워서 참는다”는 말을 약자의 체념으로만 남겨 두지 말자. 약자가 참는 세상이 아니라, 강자가 스스로 절제하는 세상을 만들자.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야 할 세상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더러워서 참는다고 말하게 만든 적은 없는가.”
[전명희]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밖철학연구소’를 설립해 연구에 몰두했지만
철학 없는 철학이 진정한 철학임을 깨달아
자유로운 떠돌이 여행자가 된 무소유이스트






